나주(羅州)는 백제 때에는 발라현(發羅縣)이었고 또 통의(通義)라고도 불리었으며 신라 때에는 금산군(錦山郡)이라 개칭(改稱)하였고 또 금성(錦城)이라고도 불리었다. 이렇게 지내오다가 신라 말엽에 견훤(甄萱)이 후백제국(後百濟國)을 세우고 그 지방을 점령하였었는데 얼마 후에 그 군(郡)에 살던 사람이 태봉(泰封:後高句麗의前身)의 궁예(弓裔)에게 항복한 바 있었다. 이에 궁예가 왕건(王建)을 정기태감(精騎太監)에 임명하여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가서 나주를 공격하여 빼앗고 지금의 지명(地名)인 나주(羅州)로 개칭하였다.
이때가 신라 효공왕(孝恭王) 6년이고 견훤(甄萱) 이후 백제를 세운지 11년 되던 해이며 태봉(泰封)의 궁예(弓裔)가 나라를 세운지 13년 되던 서기 903년이었다. 그후 912년 후인 고려 성종(成宗) 14년인 서기 995년에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진해군(鎭海軍)이라하고 해양도(海陽道)에 예속시켰다. 해양도(海陽道)는 나주(羅州), 광주(光州), 정주(靜州), 승주(昇州), 구주(具州), 담주(潭州), 낭주(朗州) 등과 함께 주현(州縣)을 이루었는데 지금의 전라남도 지방이었다.
고려 현종(顯宗) 경술(1010)년에 거란이 쳐들어오자 나주(羅州)로 난을 피하였다가 10일만에 거란을 무찌르자 다시 환도(還都)한 바 있다. 현종(顯宗) 9년(1018)에는 목(牧)으로 승격시켰는데 그후 조선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다만 조선 인조(仁祖) 때에 잠시 동안 금성현(錦城縣)으로 강등하였다가 복원한 사실이 있었다. 옛날에는 여황(艅內:光山郡 本良面), 두혜(豆盻: 羅州 會津), 거평(居平:羅州 文平面) 등은 나주군 소속이 아니었으나 후에 모두 나주에 병합(倂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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